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라트 1세 (문단 편집) === 즉위 === 무라트가 오스만국의 세번째 베이로 즉위한 1362년은, 오스만국으로서는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장해나가기 딱 좋은 시기였다. [[동로마 제국]]과 그 북쪽의 이웃나라들인 [[세르비아 제국]]과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이, '''사이좋게 [[국가 막장 테크]]를 밟아나가고 있었기 때문.''' 먼저 동로마 제국의 경우, 잦은 내전에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1341년부터 1347년까지, 1352년부터 1357년까지 황위를 둘러싸고 내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러지 않아도 기울어가던 국력이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으며, 무라트 즉위 이후인 1373년부터 1379년까지는 다시 한번 내전 크리. 결국 동로마 제국의 영토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카, 그 주변의 영토들로 축소되어 버린다.[* 물론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모레아 전제군주국이 있었으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사실상 독립국가였다.] 한편 세르비아는, 무라트의 아버지이자 선대 베이인 오르한의 시대인 1355년에 [[스테판 우로슈 4세 두샨]]이 죽은 뒤로는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스테판 두샨(Stephen Dušan)이라는 별칭으로 더 자주 불리는 스테판은 1331년에 세르비아의 왕으로 즉위한 이후 1341년부터 1347년까지 동로마 제국에서 일어난 내전을 기회로 제국의 영토를 하나씩하나씩 점령. 1346년에는 아예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황제'''' 를 자칭[* 당시 '그리스인' 이라고 하면 동로마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즉, '허약해 빠진 동로마 제국은 밀어버리고, 내가 그 후계자가 되겠음!' 이라고 선포한 거나 다름없는 것. 실제로 스테판은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과 연계하여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려는 계획까지 세우지만, 베네치아의 반대로 백지화.], 중세 세르비아의 전성기를 이룩했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빨리 영토를 확장한데다 대략 48세의 나이에 급사하는 바람에 새로 통치한 지방에 대한 지배권도 확립하지 못했고, 지방 귀족들의 힘이 강력해지는 것도 미처 통제하지 못했다. 그런데다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스테판 우로슈 5세(Stephen Uroš V)는, 이런 상황을 타개해나갈 수 없는 유약한 인물이었다. 결국 세르비아 제국은 그의 치세에 서서히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그가 죽은 뒤에는 아예 공중분해된다. 또 불가리아는, 황위 계승 문제로 인해 내부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황제였던 [[이반 알렉산더르]]가 정략상의 이유로 첫번째 황후와 이혼하고 수도원에 보낸 뒤 두번째 황후를 맞이했는데, 그와 동시에 황위 계승권도 두번째 황후와의 사이에서 본 아들인 [[이반 시슈만]]에게로 가 버렸다. 하지만 당시 이반 알렉산더르는 첫번째 황후와의 사이에서 장성한 아들인 [[이반 스라치미르]]를 두고 있었고, 계승권을 빼앗긴 데에 분개한 이반 스라치미르는 불가리아 제국의 서북쪽에 독립 왕국을 세웠다. 이것이 1356년의 일로, 이후 불가리아는 내부 분열이 일어나 나라가 셋으로 갈라졌다. 여기에, 오르한 시대에 오스만국은 처음으로 유럽으로 진출하게 된다. 1354년에 갈리폴리 반도에 대지진이 일어났는데, 1341년부터 1347년까지 장장 7년동안 계속된 내전의 결과 심각한 수준으로 약해진 동로마 제국은 피해 복구를 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걸 오스만국이 꿀꺽해버린 것. 즉 이 문단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오스만국이 발칸 반도로 영토를 확장해갈 경우의 주적인 동로마, 세르비아, 불가리아는 사이좋게 자멸한 상태였고, 발칸 반도로의 영토 확장을 위한 디딤돌도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 이제, 그 디딤돌을 딛고 나아가기만 하면 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